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 관군은 최종 방어선인 임진강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서도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이괄 군의 기동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 부사 이흥립,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해놓았는데, 정작 도하 지점인 임진나루에는 파주 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닌 민병대 수백만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민병대만을 이끌었음을 생각해보면 좀 안타까운 죽음이다.]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 병사들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 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귀는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흥립 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이흥립은 본래 박승종과 인척 관계였다가 인조반정 때 슬그머니 참여해 공을 세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 결국, 이괄은 임진강의 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결국, 인조는 음력 2월 8일 밤에 파천해야한다는 [[정엽(조선)|정엽]]의 의견을 받아들여 급히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상단 프로필란에 있는 이미지가 이때의 일을 기록한 쌍수정사적비이다.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소재이며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괄은 음력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